뉴질랜드 물치리료사 도전기

뉴질랜드 물리치료사 도전기 (1편 - 뉴질랜드 유학을 결심)

조PT 2020. 12. 3. 16:07

오늘은 2020년 12월 03일 수능날이다. 지금 이 시간 49만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최선을 다해서 시험을 보고 있다. 수능이 끝나면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될것이다. 그 중 물리치료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참고로 한 번 읽어 보길 바란다. 또한 해외에서 물리치료를 하기를 원하는 물리치료사들도 참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 경험담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려한다. 결론 부터 말하면 나는 실패했다. 뉴질랜드에서 물리치료사가 되지 못하고 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에 얼마나 관심이 있고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끄럽지만 도전기를 적어보려 한다. 

물리치료학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 부터 해외 유학과 해외에서 물리치료를 해보는 것에 대해 막연한 꿈은 있었다. 하지만 외국에서 물리치료를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몰랐고 그저 막연한 꿈이라서 적극적으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해 2007년에 물리치료사가 됐고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졸업도 하기전인 2006년 겨울에 첫 취업을 했다. 첫해 월급은 100만원 초반대에 30분 씩 환자를 12명~15명 정도를 운동치료를 했고  많을 때는 16명 까지 치료를 했다.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매일 매일 치료를 했다. 15년 전이었지만 노력에 비해 댓가는 많이 적었다(그 당시에는 월급이 적다거나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후에 연차를 쌓고 열심히 학회 교육도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내돈을 내어가며 듣고 대학원까지 진학을 해서 석사 학위까지 취득을 했다. 6년차가 되었을 때 까지 월급은 꾸준히 올랐지만 200만원도 되지 않았다. 특별히 복지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적은 월급과 복지가 좋지 않더라도 나는 물리치료사 직업 자체가 내 적성에 잘 맞고 병원에서 근무하고 치료를 하는 것은 즐겁고 보람이 있었다. 5년차 때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의 조건으로 결혼 생활을 경제적으로 여유 넘치게는 아니더라도 어려움 없이 할 수 없을거 같아서였다. 현실을 알게된것이다. 결혼 전에는 사실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형제들 모두 나보다 월등히 경제력이 좋아서 나는 내 몸 하나만 잘 건사하면 됐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게 되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있어야 했고 더 나아가 노후까지 생각을 해야했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그 모든 고민과 회의감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물리치료사 대우가 좋은 선진국에서 물리치료사로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혼 생활 3년 후에 뉴질랜드로 가서 물리치료사가 되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오랜 꿈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물리치료사의 삶에 회의감을 가장 많이 느껴졌던 때라서 좋게 말하면 과감하게 나쁘게 말하면 무모하게 뉴질랜드로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갈것을 결심했다. 아내도 처음에는 너무 큰 변화이기 때문에 반대를 했지만 충분히 논의 한 끝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해 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